Magazine B 86th Issue: USM

알프스에서 온 정글짐. 얼음 기둥 같은 차갑고 깨끗한 금속 튜브와 스노볼 모양의 둥근 볼로 연결된 USM의 입방체 구조물은 어린아이의 장난감처럼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곧 무한한 가능성을 뜻한다. 작은 선반부터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 테이블, 옷장, 부엌의 조리대, 심지어 파빌리온까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큐브의 시대
56년 역사의 스위스 모듈형 가구 브랜드 USM의 디자이너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스위스 건축가 프리츠 할러 (1924~2012)는 일찍이 “단순함은 그저 하나의 단어가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USM의 이 기발한 디자인은 제조라기보단 일종의 마법에 가깝다. 볼, 스틸 튜브, 컬러 채널이라는 점.선.면의 세 가지 기본 재료로 구성된 입방체 틀은 마치 세포분열이라도 하듯 무한 조합을 통해 다채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고 있다. USM의 역사는 1885년 스위스 베른의 작은 마을 뮌징겐에 있는 금속가공 공장에서 시작된다. 과거 스위스내 점유율 50%를 차지할 만큼 해당 분야에서 탄탄한 입지를 다진 회사로, 지금도 베른 지역의 오래된 집 창틀에선 USM 로고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USM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 가구 브랜드로 발돋움한 계기는 1961년 설립자의 3대손 파울 셰러가 엔지니어로 USM에 합류하면서다. 회사의 성장과 제조 공정의 변화에 따라 유연하게 변모.확장할 수 있는 새로운 공장의 필요성을 느낀 그는 건축가 프리츠 할러에게 모듈형 건물의 설계를 의뢰했다. 산업 시대의 제조 기술과 금속과 같은 산업 재료를 건축 소재로 도입해 해체와 조립이 용이하면서도 비교적 저렴한 건축물을 짓는 건 당시의 경향 중 하나였다. 프리츠 할러는 다양한 크기의 강철 모듈을 사용해 건축물의 표면적을 쉽게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미니 Mini, 미디 Midi, 맥시 Maxi’ 시스템을 개발하며 이름을 알렸다.

 

세계 최초 모듈형 가구의 탄생
공장과 사옥에는 새로운 가구도 필요했다. 할러는 이 공간을 위해 효율적이면서도 경제적인 가구를 만들었고, 건축에서 사용하던 ‘미니,미디,맥시’ 시스템을 가구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볼과 튜브, 컬러 스틸 패널 등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바탕으로 1963년 프로토타입을 제작한 USM은 1965년 볼 (고정 장치인 커넥터와 함께) 특허를 획득했다. 이 명쾌하고도 기발한 모듈형 가구는 쓰임과 환경에 따라 어떤 높이와 폭으로든 전환이 가능했다. 이는 화려한 장식을 배제한 기능주의 미학과 모더니즘 디자인을 설명할 때 늘 등장하는 루이스 설리번 Louis Sullivan의 명언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 (Form Follows Function)’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셰러는 할러에게 작은 2층집을 지어줄 것을 부탁했다. 유럽의 건축 잡지들은 앞다퉈 USM 공장과 오피스를 소개했고, 내부의 가구들은 자연스레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69년 파리 로스차일드 은행이 사무실에서 사용할 가구로 할러 시스템의 워크스테이션 600대를 주문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USM은 유명세를 탔다.

 

 

 

 

단순성과 지속성
1989년에는 기능성 오피스 데스크 ‘키토스 Kitos’를 론칭하고, 1998년 독일 함부르크에 첫 쇼룸을 연 USM은 이후 스위스와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에 플래그십 스토어를 오픈하며 현대적 사무 디자인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USM이 관심을 갖는 건 지속성이다. 이 지속성은 늘 변함없는 대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스위스 사람들의 정신이기도 하다. 할러 시스템은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이어온 가구 디자인으로 여전히 최신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기능과 정밀함, 심플함과 눈에 띄지 않는 우아함의 조합은 어떤 패션 트랜드도 능가한다. 가구 시스템이 하나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모듈형 원리 덕분에 한 세트의 가구를 개별적으로 구성할 수 도 있어 질리는 법이 없다. 게다가 에너지 소비량이 많고 사용 주기가 짧은 목재 등의 자연 소재 제품보다 훨씬 친환경적이다. 다채로운 컬러는 USM 의 또 다른 매력이다. 1960년대 중반에 출시한 최초의 USM 할러 컬러는 ‘USM 그린’으로 알려진 밝은 녹색이다. 이후 점차적으로 다른 색들을 추가하면서 오늘날에는 퓨어 화이트부터 골든 옐로, 매트 실버 등 14가지 색상을 선보이고 있다. “할러 시스템은 우리에게 디자인적 영감을 줍니다. 형태와 기능의 조우가 무엇인지 보여주죠. 존재 자체만으로도 공간에 견고한 아름다움을 불어넣습니다. USM은 현대적이고 실용적이면서도 매우 우아합니다.”

 

시대를 초월한 모던의 아이콘
쉰 살이 훌쩍 넘었지만 USM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살로네 델 모빌레 Salone del Moblie)에서는 무려 5,008개의 볼과 1만318개의 튜브로 만든 거대 부스로 화제를 모았다. 관람객은 이 설치물을 오르내리고 만져보며 익숙하면서도 낯선 소리를 듣고, 금으로 된 변기처럼 장난스러운 요소들과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색의 순간을 마주한다. 이를 통해 USM의 무한한 잠재력과 친밀감,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속 가능성과 환경친화적 구성 요소를 생각하는 USM은 최근에는 새로운 플랜트 액세서러리를 도입하기도 했다. 아파트나 회사 사무실 등 어디에서든 자연을 담을 수 있는 모듈형 솔루션으로 거실 한가운데 오아시스를 만들거나 부엌에 허브 카트를 설치할 수 있다. 제품의 긴 수명은 USM의 가장 큰 자산이다. 1980년대에 주문한 할러 시스템을 업데이트하면 거의 별 문제 없이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이 가능하다. 새 모듈은 기존 모듈에 그냥 끼우기만 하면 된다. 전세 주기에 맞춰 쓰고 버리는 인스턴트 가구가 넘쳐나는 요즘 같은 때에 늘 한결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삶과 관계 맺는 가구가 있다는 건 더없이 소중한 일이다. 최고의 현대 건축과 디자인이 있는 곳에는 할러 시스템이 늘 자리한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 때 기차역으로 쓰였던 오르세 미술관 (Musèe d’Orsay)의 황금빛 천장 아래엔 지금도 짗부른빛 USM 안내 데스크가 놓여 있다. USM이라는 은빛 열차가 싣고 온 스위스 모던의 미학은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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